• 2023. 4. 13.

    by. 성격급한나무늘보

    1.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1889년 7월 초, 고흐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발작을 일으키며 붓과 물감을 먹는 자해를 저지릅니다. 한 달이 넘게 착란 상태가 계속되며 악몽에 시달렸고, 의사는 자해 방지를 위해 그림 그리기를 금지합니다. 그는 동생태오에게 제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의사를 설득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이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두 달이 지난 8월 말이 되어서야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첫날, 고흐는 거울을 보고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담습니다. 모델을 구할 수 없어 여러 번 스스로 모 델이 됐고, 10년의 화가생활 중 서른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긴 그였지만 이번에는 긴 고통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화상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어떤 자화상을 먼저 그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흐는 이 기간에 네 점의 자화상을 그립니다. 그중 가장 격렬한 감정이 느껴지는 작품은 소용돌이가 가득한 <자화상>으로, 고흐는 단정한 정장을 입었지만 수척해진 얼굴 속 찌푸린 미간, 불안한 눈동자, 굳게 다문 갈라진 입술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녹생으로 채색된 눈동자, 붉고 노란 수염과 머리, 청록색의 배경이 강렬한 보색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반 고흐가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말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에 그려진 것입니다. 1888년 반 고흔 ㄴ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서 함께 작업할 것을 종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화가의 만남은 반 고흐가 날카로운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파국을 맞았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고갱과 윤리적이며 격정적인 반 고흐의  결합은 순탄할 리 없었습니다. 특히 그림에 관해서는 논쟁과 화해를 반복하며 다룸의 강도를 높여 갔습니다. 마침내 고갱은 괜찮다면 이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동생 태오에게 쓰겠노라고 통보하였고, 반 고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둔 날 반 고흐는 면도칼을 손에 들고 고갱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가 결국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자르고 그것을 창녀에게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갱은 파리로 떠났고, 한 고흐는 병원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병원에서 동생 태오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린 것으로 그는 태오에게 "편지보다는 초상하가 내 상태를 더 잘 보여줄 거라고 믿는다"며 이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자화상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 그의 강한 눈빛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작품의 배경에 그려진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풍의 그림은 그가 일본 판화에 빠져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며 새로운 희망을 엿보게 합니다.

    2. 꽃피는 아몬드 나무

    힘든 해가 지나고 1월의 마지막 날, 조카가 태어납니다. 태오와 요한나는 아이의 이름을 예정대로 빈센트 빌럼 반 고흐로 지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흐는 당장 파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장거리 여행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신 기쁨과 축복의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내고, 인내 조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합니다. 캔버스 속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가 굳건하게 뻗어 오릅니다. 가지 위로는 만개한 꽃과 막 피어나는 꽃 그리고 꽃망울이 맺혀있습니다. 캔버스에는 고흐가 자주 표현했던 강렬한 색채와 어지러운 곡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은 온화하고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붓질도 정갈합니다. 과감한 구도와 원근법의 부재 등으로는 그가 좋아했던 일본 목판화의 영향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 나고은 가지들 위,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성급한 꽃들을 보며 봄이 오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2월이 되면 프로방스 지역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아몬드 꽃이었고, 아몬드 꽃은 성경에서 봄의 전령사,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의 이미지로 표현되고는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조카에게 자기같이 굴곡진 삶이 아닌 희망을 캔버스에 담아 보내고 싶었습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세상에 희망을 알리려 오는 아몬드 꽃을 조카의 침실에 걸어주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에게도 조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내용과 아이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조카를 위한 그림은 완성되었고 고흐는 태오에게 지금까지 그린 것 중 가장 끈기 있게 작업한, 차분하고 더 안정된 붓질로 채색한 최고의 작품이라며 스스로 만족감을 표했습니다. 테오도 그림을 만족해하며 가족과 방문하는 이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침실이 아닌 거실 피아노 위에 걸어두었습니다. 조카의  탄생과 함께 고흐 스스로에게서도 새로운 희망이 탄생해/ㅅ고, 실제 그 길이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3. 별이 빛나는 밤에

    요양원에서 보낸 첫 달은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이 제한되었습니다. 외출은 불가능했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정원에서의 산책이 고작이었지만 그는 착실히 적응하며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 달이 흐른 후 요양원 가까운 곳으로 나갈 수 있게 되자, 사이프러스와 밀밭, 올리브 나무와 같은 고흐 특유의 풍경화들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도 이 시기에 완성됩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동경하던 밤하늘의 무한함을 표현한 작품으로 아를에서 그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이후 두 번째로 밤하늘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본 새벽 풍경과 산책하며 보았던 마을의 모습을 조합하여 창조한 작품으로 회오리치는 듯 격렬한 두꺼운 붓터치와 강렬한 색 조합이 고흐의 어지러운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